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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田舎のパン屋が見つけた「腐る経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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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田舎のパン屋が見つけた「腐る経済」)

레테210 2015. 11. 27. 18:49

 

<왼쪽이 친구가 빌려준 원서. 오른쪽은 다 읽고나서 다른 친구 선물용으로 산 번역본>

 

작년 초였던가, 지인 한 명이 일본에 빵을 사러 다녀오겠다고 했다. 구글지도로 빵집 위치를 보여주는데 이건 숫제 산골 깡촌이었다. 무슨 대단한 빵이길래 바다 건너 남의 나라 두메산골까지 찾아가야 하느냐고 묻자 지인은 천연효모빵을 사러 간다며 그 집 주인이 썼다는 책을 한 권 보여주었다. 천연효모빵집이라면 우리나라에도 많은데하고 생각하며 표지를 보니,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제목부터 대충 이 왔다. ‘첨가물 범벅 먹을 거리에 염증이 나 좋은 재료만 골라 온갖 정성으로 빵을 빚어내는장인의 고군분투기정도 되겠구나. 그런데, ‘자본론을 굽는다? 확실히 호기심은 들었지만 그 호기심과 함께 부담감도 생기는 묘한 제목이었다. 아마도 자본론부분 때문이리라.


이후 여기저기서 이 책의 이름은 많이 들었지만 읽을 기회가 없다가 우연히 친구가 원서를 강제로 빌려주어 읽게 되었다. 원제는『田舎のパンつけた「腐経済」』(시골빵집이 발견한 썩는 경제’). ‘썩은 경제라면 쉽게 이해가 갔겠지만 썩는 경제가 되니 뉘앙스가 좀 달랐다. 다시 호기심이 발동했다.

 

사실 썩음은 이 책이 말하고자 알파와 오메가, 거의 모든 것이다. 저자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많은 부조리와 문제의 원인이 썩지 않음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지적에 나는 상당 부분 동의한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우주 삼라만상은 순환해야 하고 그러려면 건강했던 모든 것들이 언젠가는 썩어 스러져야하지만, 자본주의는 이 순환시스템을 원천적으로 기능부전에 빠지게 만든다. 자연이 썩고 사람의 몸이 썩어갈지언정 단 하나의 성역인 자본(=)만큼은 모두에게 골고루 분배되어 쓸 곳에 쓰이면(=썩어 없어지면) 안 되고 한곳에 차곡차곡 쌓여야 하기 때문이다.

 

책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먼저 썩지 않음을 추구해서 생기는 온갖 부조리에 메스를 들이댄다. 저자는 대학 졸업 후 유기농 식재료 도매업체에 취직한다. 그러나 지구와 인간을 생각하는 유기농의 가치 따위 엿 바꿔 먹은 지 오래인 이 업체에서는 원산지 위조와 리베이트 수수가 횡행한다. 자괴감을 이기지 못하고 퇴사한 뒤 기술을 배우러 들어간 곳은 빵집. 첨가물과 인공천연(?)효모, 농약으로 범벅이 된 빵이 천연효모 무첨가빵으로 둔갑해 팔려나가는 것을 목격한다. 이 모든 부조리한 상황은 (생산자와 노동자에 대한) 노동 착취라는 공통 분모 위에 성립되어, ‘썩지 않고 무한 증식하는 자본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로 수렴되고 있었다. 극도의 회의감과 육체적 피로에 찌든 저자의 마음 속에는 작을지언정 진정한 무엇을 만들고 싶은 간절한 바람이 쌓여간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정신적인 유산(맑스의 자본론)이 그의 등을 떠민다.

 

2부에서는 그 바람을 하나씩 현실화해 가며 겪는 시행착오와 발견의 과정이 묘사된다. 저자는 아내와 함께 비로소 자신들의 소박한 가게를 열지만 진짜를 만들기 위한 과정은 녹록치 않다. , , , 그릇 등 모든 것을 발효과정의 주역인 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정해야 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이 유기농쌀자연재배쌀의 말로(?)의 극명한 차이였다. 균들은 유기농쌀로 만든 반죽은 가차없이 버려(부패시켜)’ 버렸지만 자연재배쌀로 만든 반죽은 제대로 썩혀(발효시켜)’ 주었다. 친환경농법의 대명사가 된 유기농이지만, 그 이면에도 인간의 편의와 효율성 추구라는 그림자가 흐릿하게나마 드리워져 있었던 것. 물론 유기농쌀조차 비싸서 맘놓고 먹지 못하는 서민들에게야 자연재배쌀따위 그림의 떡 같은 이야기라는 게 아직은 아쉽지만


저자의 헝가리 체류 경험담도 흥미롭다. 사실 이 아저씨, 소싯적 좀 놀았던(?) 모양이다. 사진 속 지금의 모습으로는 무기정학 맞고 편의점 앞에 모히칸컷을 하고 쭈그려 앉아 담배나 꼬나물고 있었을 고딩의 모습이 도무지 상상이 안 가지만..ㅋ 아무튼 세상 만사 아무 관심도 의욕도 없이 삐딱하게만 보던 저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저질 음식이나 사먹으며 권태롭고 무기력한 나날을 보낸다. 부모님, 특히 아버지와의 사이가 평탄할 리 없었다. 가히 인생의 암흑기라 부를만한 시기


그러던 그에게 우연히 헝가리에서 1년을 보낼 기회가 주어진다. 그런데 사람 일 어찌될 지 모른다고,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헝가리 조폭도 양아치도 아니고, 뜬금없게도 먹을 거리가 주는 충격이었다. 각종 첨가물 등으로 거짓말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식재료와 이 재료를 제대로 썩혀 만든 치즈, 와인 등 건강한 발효음식을 맛본 그의 몸과 마음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회복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인생의 일대 전환기였다. 이 부분은 영국의 유명 요리사 제이미 올리버가 진행했던 학교급식 개선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한다. 정크푸드에 중독돼 있던 아이들이 건강한 재료로 정성껏 만든 진짜 먹을 거리를 접하면서 불과 수 개월 사이에 몸과 마음이 극적으로 바뀌어가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 BBC 프로그램 얘기다. 심봉사 눈 뜨듯 신세계를 경험한 저자도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이쯤 되면 그전의 무의미해 보이던 삶도 이 강렬한 원체험을 더욱 또렷이 느끼게 하기 위한 준비단계였던 것 같기도 하다. (역시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볼 일이다. 기승전해외여행-_-???)

 

천연누룩균에 관한 부분에서는 약간의 의구심이 생기기도 했다. 발효음식 얘기에는 곧 죽어도 한 마디 끼어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인 이상, ‘누룩균으로 발효음식을 만드는 문화를 가진 나라는 일본 말고 없다는 대목에서 잠깐만요-_-?’를 외치지 않을 수 있을까ㅎ 눈에 불을 켜고 인터넷을 마구 뒤졌고, 결론은 저 말을 완전히 뒤집을만한 발견은 안타깝게도 아직 없었다. 하지만 발견 못함=없음은 아니라는 사실ㅎㅎ 내 검색 실력 부족 때문이라 굳게 믿는다.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돈은 미래를 선택하는 투표권이라고 적고 있다. 아니 알 만한 분이 남의 말을 표절하면 어떡해요? 싶을 정도로 내 생각과 표현까지똑같았다(물론 어디서 멋진 말을 주워들으면 한참 지나 내 표현인양 태연히 쓰곤 하는 내 버릇 때문이다 ㅋ). 어차피 쓸 돈 이왕이면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하는 곳에 쓰고 싶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군가를 착취해서 이윤을 내는 곳은 가급적 피해 다닌다. 대단한 정의감과 공명심이 있어서가 아니다. 착취로 만들어지는 물건이나 서비스란 돌고 돌아 나 역시 착취하게 마련이라는 것을 나름의 경험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피할 요소는 너무나 많고 뭔가 살 때마다 매번 그런 것을 고려한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따라서 언제나 무결점인 곳을 선택한다고 할 수는 없고 사실은 거의 늘 차점자’, ‘차차점자를 선택하는 식이다. 하지만 투표를 기권하지 않다 보면 가끔은 정직하고 믿을 수 있는 곳이 나타나준다. 그리고 그들은 대개 서로 연결돼 있다. 저자 와타나베 이타루가 진짜 빵을 만들기 위한 여정에서 만났던 동지들이 그러했듯.

 

지인은 기어코 그 산골마을까지 찾아가 빵을 사오는 데 성공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 대화는 거의 못했다지만 표정만큼은 한눈에 봐도 만족스러워 보였다. 빵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아서였거나(좀 달라고 해볼걸), 깨끗한 한 표를 행사한 것이 만족스러워서였거나뭔지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생각으로 지금도 열심히 균과 씨름하며 빵반죽을 치대고 있는 분들이 많을 테니 조만간 확인할 수 있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