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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시대, 인간의 일

레테210 2016. 2. 22. 17:10

자주 가는 카페에 올렸던 글인데, 일본 관련은 아니지만 일과 관련이 있어 같이 올려본다.


 

한겨레신문 기자 겸 사람과디지털연구소 소장인 구본권씨의 2015년 신간입니다.

요즘 무섭게 발달하고 있는 딥러닝이나 빅데이터 축적, 인공지능, IT기술, 로봇 기술로 인해

'앞으로 00년 내에 사라질 직업'의 범주가 점점 넓어지고 있죠.

이제는 막연하지만도 않은, 상당히 구체적인 미래가 되어버린 '로봇에 의한 인간 노동 대체' 전망에 대해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게 정리되어 있어요.

그리고 총 열 개의 챕터 중 하나(Chapter 2_자동 번역 시대, 외국어를 배울 필요가 있을까)가

통째로 '통역, 번역, 외국어'에 관한 내용에 할애되어 있지요.

무인자동차나 지식 공유 등 다른 분야에 관한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여기는 통번역사 카페니까 우리 일과 관련된 부분만 리뷰(라기보다는 제 생각 나열이 되겠지만)해볼게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 온 것은 사실 그 연원이 생각보다 무척 오래되었고

통번역도 그 중의 하나가 된 지 이제는 꽤 되었다지만 이는 여전히 논쟁적이고 민감한 부분입니다.

통번역사의 권익과 같은 현실적인 당위를 떠나, '언어(외국어 포함) 습득'이라는 인간의 본능과도 관련된 부분에서 어디까지

'굴러들어온 돌'에게 자리를 내줄 것인가? 하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인 영역과 맞닿아있기 때문입니다.

일단, 단순히 방대한 양의 빅데이터가 축적되고 다양한 기계적 조합의 기술 수준이 향상된다고 해서

이야기 자리나 문맥의 분위기, 저자나 화자의 언어화되지 않은 의도, 미묘한 뉘앙스 등을

기계가 인간보다 잘 캐치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직은' 말이죠.

하지만 우리가 하는 모든 통번역이 다 이런 '인간만의 고도의 분위기 파악 능력', '기지' 등을 매분매초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매뉴얼이나 판례문 등 정형화된 문서의 경우 이미 기계번역으로 상당부분 대체되고 있는 게 현실이라

그 존재를 눈가리고 아웅식으로 부정하며 누구 탓을 할 수만도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만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능력의 범위도 점점 좁아지고 있고요.

요즘 저는 제가 한 번역조차 '어디까지가 진짜 내가 한 것일까'라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인터넷이 없었다면 정말 알아내기 힘들었을 것 같은 정보, 지식을

내가 클릭해서 '찾아내고' 타이핑해서 '문서화'했다는 이유만으로 이것이 내가 번역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사실 '내가 했다'는 번역물 속에는 컴퓨터와 인터넷라는 '하청업자'가 한 일도 꽤 많았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ㅎ

물론 그런 식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컴퓨터와 인터넷 세상에 축적된 지식과 정보란 것들도 결국은 누군가 인간이 입력해놓은 것이고

그 데이터에 접근하기 까지 제가 나름대로 가동시켰던 제 머릿속 작업의 가치도 나름대로 있을테니

무조건 '재주는 곰(컴퓨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인간)이 번다'는 식으로 구도를 단순화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요는, '정말 인간이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인지, 어디부터 '(컴퓨터에게) 외주를 줄 것인지'를,

일을 하는 주체와 그 일의 범위를 한번 새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이 책도 제목은 언뜻 도발적이지만 막상 읽어보면 이런 식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 묻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해 당사자집단인 통대에서는 어떤 식으로 논의되고 있는지요?

요즘 학교를 안 다녀서 잘 모르겠는데, 제가 다니던 시절(약 8-9년 전)에는 그런 수업 시간은 딱히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정도로 빨리 기술이 발달할 것이라고는 뇌과학자 김대식씨조차도 예견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을 정도니까요.

하지만 이젠 그런 논의가 필요할 것 같아요. 가능하다면 통대 입학 전부터요.

어디에서도 그런 장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해도 혼자서라도 생각해둬야겠지요.

이때 입문서로 삼을만한 책들이야 찾아보면 다른 것도 많겠지만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한국인 전문가가 쓴 책'이기 때문인데요. 넘 시시한 이유인가요? ㅎ

대중과학서 분야는 아무래도 영미권이 강세를 보이기 때문에 그쪽 번역서가 많죠.

(이 책은 인문사회적 성격이 강해 순수한 대중'과학서'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하지만 내용은 괜찮은데 한국어 문장이 영 별로인 경우도 많잖아요.

해당 분야 전문번역가가 아닌데 연구원이라는 이유로 감수 없이 번역했다든가,

편집자 자질이 별로여서 번역투 문장을 걸러내질 못한다든가 하는 이유로...

이 책은 그런 부분에서 '원천적으로' 합격입니다. ㅎ


 

높은 시의적절성과 가독성 외에 개인적으로 특기할만한 곳을 적자면

'중국어방 실험'에 관한 소개 부분, 그리고 '언어 장벽이 사라지는 시대에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전자의 경우 "가령 컴퓨터가 모든 언어의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답한다 해도 그것이 '상대방의 질문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말하는 게 아닌

미리 프로그래밍된 '기계적'인 답변일 뿐이라면 그 지능은 진정한 의미의 인간의 지능이라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후자의 경우, 제가 요즘 직업상 관련된 언어 말고 순전히 '앎의 즐거움'을 얻고 싶어 다른 외국어를 공부하고 있어 더 흥미로웠어요.

저는 쓸데없는 노력을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일 세상이 망해도 나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ㅎ

(정말 솔직한 심정을 적자면, 어차피 인공지능이 발달할 거라면 어중간하게 빠른 속도가 아닌 아예 어마어마한 속도로 발달해서

차라리 나를 하루빨리 완벽한 다언어구사자(polyglot)으로 만들어줬으면! 하는, 조금 발칙한 상상도 하곤 합니다 ㅋ)

 

참고로 제가 이 책을 처음 접한 게 작년 12월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였어요.

책이 나올 때만 해도 체스에서는 컴퓨터가 인간 챔피언을 이미 오래전에 물리친 상태였지만(1997년) 

바둑은 체스보다 경우의 수가 훨씬 많아 공식 기록만 놓고 보면 '아직'은 인간이 컴퓨터보다 아슬아슬하게 우위에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던 것이 불과 그 다음 달인 올해 1월 28일, 컴퓨터가 드디어 유럽 바둑 챔피언 판후이 프로 2단을 상대로 5전 전승을 거두죠.

구글 인공지능 개발 엔지니어 데미스 하사비스가 "조만간 바둑과 관련해 놀랄만한 일이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고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 지(2015.11.23) 겨우 두 달 만의 일입니다.

(사실 저도 이 뉴스 듣고 문득 팟캐스트에서 들은 게 다시 생각나 이 책을 읽었어요)

그리고 이제 다음달인 3월9일에는 우리의 호프 정도가 아닌 '호모사피엔스의 호프' 이세돌과 구글 인공지능 컴퓨터 '알파고'와의 세기의 대결이 펼쳐집니다.

<로봇시대, 인간의 일>은 그 결과를 기다리며 지금 읽기에 가장 흥미진진한 책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