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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파친코>

레테210 2019. 7. 18. 17:13

 

 

 

 

작년 11월, 일본인 친구 Y를 만나기 위해 오사카를 찾았다.

Y는 가족을 소개해주겠다며 오사카의 한인상가 밀집지역 쓰루하시 시장에 있는 야키니쿠집 'アジヨシ(아지요시)'로 나를 안내했다.

'아지요시'. 일본어로 '맛있다'는 뜻인데, 한자나 히라가나가 아닌 가타카나로 쓰인 걸로 봐서 '아지요시'->'아죠시'->한국어 '아저씨'를 함께 연상시키기 위한 네이밍이 아닐까 싶다. 

역에서 나와 시장통에 있는 가게로 가려면 나지막한 굴다리 하나를 지나야 한다.

굴다리 안은 안개인지 때마침 근처 야키니쿠집들이 뿜어내기 시작한 연기 때문인지로 자욱했고, 좁고 뿌옇고 매캐한 공간을 사람들이 부지런히 지나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느낌을 담아보고자 핸드폰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사방이 온통 흐릿해서 도무지 형체를 잡기 힘들었다.

 

 

가게에 들어서자 입구 가까이 미리 자리잡고 있던 Y의 어머니와 동생, 친구가 나를 맞이해 주었다. 

그런데 인사드리기가 무섭게 Y의 어머니는 대뜸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는 여기서 평생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 열심히 살아왔어. 그런데 투표권이 없단다. 얘들은 있는데 나는 없어. 그래서 선거날만 되면 애들한테 투표 꼭 하라고 내가 얼마나 닥달을 하는지 몰라."

걸쭉한 오사카 사투리로 탄식하듯 말씀하시는 아주머니는, 그랬다. 재일교포였다. 평생을 일본에서 살아 한국어는 잘 못 하셨다.

Y의 경우 아버지가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일본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고 선거권이 있다.

그날 술자리가 파할 때까지 아주머니는 투표권 이야기를 몇 번인가 더 하셨다.

 

재미 소설가 이민진의 <파친코>는 그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사카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야 '이제는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막상 사놓고서도 어쩐지 선뜻 손이 가지 않다가 겨우 읽기 시작한 것이 지난 주의 일이다. 

한번 펼치자 읽는 것은 금방이었다. 

20세기 거의 전부를 커버하는 시대 설정 속에 총 다섯 세대의 한국인과 그 주변 인물들이 등장하고 부산에서 오사카, 나가노, 도쿄 등 여러 지역이 무대가 되어 펼쳐지지만 이야기 전개가 빠르고 문장 표현도 어렵지 않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초 부산 영도라는 곳을 배경으로, 하숙집 딸 선자가 고한수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시장의 생선 중개상 고한수는 훗날 야쿠자 보스가 되는 인물로, 이때 이미 오사카에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지만 선자는 그 사실을 모르고 덜컥 그의 아이를 임신하고 만다.

이때 하숙집에는 오사카의 형님집을 방문하기 위해 평양 출신의 병약한 목사 백이삭이 와서 묵고 있었다.

이삭은 결핵에 걸려 사경을 헤매는 자신을 선자가 도와준 사실을 잊지 않고,

고향땅에서 살기 힘들어진 그녀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그녀와 결혼하기로 마음먹고 부부가 되어 오사카를 찾는다. 

오사카에서 선자는 이삭의 둘째형 요셉의 집에 묵으며 고한수의 아들 노아와 이삭의 아들 모자수를 낳는다.

소설에는 총 다섯 대에 걸친 인생 유전이 펼쳐지는데, 중심축은 이 두 이방인, 노아와 모자수 형제로 보인다.

형제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일본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애쓴다.

노아는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최고 엘리트가 되는 방식으로,

모자수는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조선인 출신은 어차피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철저히 생존만을 위해 투쟁하는 방식으로. 

일본 최고 사학 중 한 곳인 와세다대학에 들어가 명문가 여자친구까지 생긴 노아는 숨겨왔던 그의 배경, 즉 조선인 혈통에 친부는 야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견고히 쌓아온 인생의 벽돌들이 허무하게 무너져내리기 시작한다. 그 마지막 벽돌마저 무너져내리기 직전에 노아가 몸을 의탁하고 있던 곳은 와세다 대학 출신에게 걸맞는 은행도, 대기업도 아닌 지방 도시의 파친코 가게였다. 

모자수는 일찌감치 학업에 미련을 버리고 그저 호구지책으로 파친코 가게에 종업원으로 들어갔다가 일솜씨를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며 부를 축적한다. 

하지만 파친코로 돈을 벌면 벌수록 그에게 찍힌 '파친코를 운영하는 재일조선인=야쿠자, 범죄자'라는 낙인은 더욱 또렷해질 뿐이다.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그나마 아버지가 이룬 부 덕에 가난의 설움이나 또래의 괴롭힘은 겪지 않고 자라지만 그 역시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영속적으로 거주할 권리가 없어 3년마다 생일날이 되면 관청에 가서 새로 거주 등록을 해야 하는 이방인 처지다. 

그는 해외 유수의 대학을 나와 외국계 기업의 일본 지점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의 외국인들에 둘러싸여 일하게 된다.

언뜻 '잘 풀린 버전의 노아' 같다.

하지만 일본인 상사에 의해 석연치 않은 이유로 해고당한 뒤 결국 아버지의 파친코 가게로 돌아오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들이 수렴되는 곳은 결국 '파친코'인가 싶다. 

이쯤 되니 표지의 그림이 처음 보았을 때보다 조금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그 속에 파친코 구슬은 보이지 않는다.

화려한 나비 장식과 줄지어 늘어선 파친코 핀들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구슬은 어디에서 낙하하든,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듯하다가도 결국은 미리 정해진 핀의 배열에 따라 움직일 것이다.

최소한의 불규칙한(즉, 자유로운) 움직임마저 파친코 업체에서 미리 조정해놓은 승률의 영향을 받는다. 

아무리 똑똑해도, 능력이 출중하고 성실해도, 귀화를 해도, '재일'이라는 딱지가 평생을 따라다니며 보이지 않는 편견과 차별을 가능케 하는 장치로 작동하는 것과 닮아있다.

이런 설정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과거 일본 사회 속 재일 교포의 위상과도 대체로 일치한다. 

지금은 어떨까.

재일교포 차별의 상징과도 같았던 지문날인법이 폐지되고 외국인 등록증을 상시 휴대하지 않아도 되게 바뀐 지 이미 오래. 

과거 많은 연예인들이 재일 출신임을 숨겼던 것과는 달리 4세, 5세 재일교포 중에는 혈통과 이름을 떳떳이 밝히고 활동하는 연예인들도 있다고 들었다.

'나와 남', '안과 밖'을 가르는 보수성과 폐쇄성이 두드러지던 일본 사회도 바뀌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면 단순히 세월이 흐르면서 몇몇 형식적인 문제가 정리된 것에 불과한 것일까. 

 

오사카에서 Y를 만나 야키니쿠집에 가기 전, 시내를 잠시 혼자 돌아다니던 내 핸드폰으로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주오사카 한국 영사관에서 온 문자였다.

내가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리 근처에서 곧 혐한 시위가 열릴 예정이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혐한 시위에서 쏟아져나오는 말들 중에는 외국으로서의 한국을 비난하는 내용도 있지만, '재특회'('재일한국인의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임')가 주요 참가 세력인 만큼 재일 교포에 대한 노골적인 공격과 극언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작년에 한국에서도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 <카운터스>에 이러한 극우단체의 혐한 시위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일어선 또다른 일본 시민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도 요 몇 년 동안 중동 난민이나 조선족,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 유입 문제를 놓고 다문화를 옹호하는 쪽과 비난하는 쪽으로 나뉘어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백주대낮에 길거리에서, 만인을 대상으로, 특정 집단에 대해 저렇게까지 지속적이고 집요하게 살기등등한 폭언을 내뱉고 위협을 가하는 현상이, 한국에서도 일상적이었던가.

사회가 제도적 차별을 멈추면, 혐오가 제도권 밖에서 발톱을 드러낸다. 

어느 나라, 사회나 마찬가지다.

다만 일본의 경우 내게는 그 발톱이 유독 더 날카로워 보인다. 

Y와의 약속 시간을 지키기 위해 일찌감치 자리를 뜨기는 했지만 마음은 이미 복잡해질대로 복잡해진 상태였다. 

 

다시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소설 속에는 그러나 핏발 선 눈으로 '조선인을 죽여라', '재일 한국인은 비열한 범죄자'라고 외치는, 광복절 특집극에서 자주 볼 법한 '나쁜' 일본인은 '직접적으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요셉이 일하는 비스킷 공장의 공장장 시마무라도, 노아를 경리로 쓰던 일본인 사장 호지도, 딱히 요셉이나 노아가 조선인 출신이라고 직접적인 차별을 가하거나 괴롭히지는 않는다.

조선인 노동자를 쓰는 일본인 사장이라는, 딱 그 입장만큼 냉정하고 계산적인 면모를 갖추었을 뿐이다.

(이 부분에서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문득 떠오르기는 한다만...)

소설 앞부분에서 이삭이 일본 순사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초를 당하고 죽기 직전에야 풀려나오는 모습이 묘사돼 있는데, 그런 장면에도 린치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는 않다. 

오히려 선자가 김치를 팔던 시장의 돼지 도축 업자, 모자수의 학창시절 친구 하루키, 노아의 대학시절 여자친구 아키코, 모자수의 후처 에쓰코와 솔로몬의 첫사랑 하나처럼 '구체적인 개인' 한 명 한 명은 대체로 이들에게 친절하고 재일 한국인의 입장에 공감하려 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개인적으로는 Y의 어머니가 투표권 얘기만큼이나 열성적으로 하셨던 이야기-'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분은 (일본인) 시어머니'라는-가 떠올랐다)

물론 이 등장인물들이 대체로 사회 기층민, 혹은 어딘가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이라는 식의 분류도 가능할 것이다.

가장 흥미로웠던 인물은 솔로몬의 회사 상사인 일본인 '가즈'였다.

솔로몬을 영입해 프로젝트를 성사시킨 후 마뜩치 않은 이유로 해고해 버리는 위선적인 인물이다.

부하가 조선인 혈통이라고 차별하기는커녕 그를 자신의 이너서클에 초대하고 나름 자유주의자같은 시각도 피력하지만 일이 끝나자 곧바로 해고해 버리는 모습은 어딘가 비정한 미국식 자본주의 문화를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실제 미국에서 자라 예일대학을 나온 작가는 가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 가즈가 빌어먹을 인간이었지만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가즈는 나쁜 인간 중 한 명이고 일본인이었다. 어쩌면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그런 짓을 배웠는지도 몰랐다. 나쁜 일본인들이 수백 명 있고, 좋은 일본인이 한 명 있다 해도 솔로몬은 진실을 왜곡하지 않기로 했다.

 

이런 중층적인 시각은 소설을 더욱 사실적이고 입체적으로 만들지만 어떤 이에게는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딱히 일본을 의식한 저자의 안배나 계산된 도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애초에 저자가 <파친코>를 집필하게 된 동기가 재일교포 중학생이 집단 괴롭힘을 당한 뒤 자살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위에 적은 노아-모자수 형제와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아들들의 서사 외에도 그 주변에서는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결말은 다소 진부해 보일 수도 있지만(굴곡진 시대를 지내온 가족 연대기에 흔히 등장하는,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식의 결말은 워낙 예측 가능한 것이다보니;;)

사실 어떻게 보면 진부한 것이 가장 현실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많은 재일교포와 나눈 인터뷰를 바탕으로 했다고 한만큼 이야기의 리얼리티는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군데 신경쓰이는 부분은 있다. 

일단 20세기 초 일본에서 목회 활동을 편 조선인 '목사' 가족의 서사라는 점에서...약간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느낌.

기독교라는 종교의 사상이 보편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단순히 그 당시 오사카에 자리 잡은 재일교포 중에 종교 지도자가 얼마나 됐을까, 하는 그런 의미에서의 '보편성'이다.

소설 속 인물들이 꼭 특정 시대 특정 집단의 '평균치'여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이삭-요셉-경희(요셉의 아내) 이 세 가족의 사고방식이나 가풍이 당시로서는 너무 현대적, 이상적이고 고상하달까, '종교적'(기독교, 불교를 떠나) 규범을 너무 충실히 체현하고 있어 기품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소시민의 입장에서 솔직히 쉽게 공감이 가지는 않았다. 

특히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하숙집 딸 선자를 이들이 큰 갈등 없이 부인, 가족의 일원으로 맞이하는 부분이 그랬다.

아무리 박애주의와 종교적 신념으로 무장한 캐릭터라 해도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매끈하게 전개되면...인물의 정서에 이입하기 쉽지 않은 독자도 있을 것이다.

그 연장선상에 있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모자수라는 캐릭터와 그의 상도덕?을 묘사한 부분에도 개인적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그는 재일 한국인이고 파친코를 운영하지만 폭력배와 연루되지 않고 시종일관 어디까지나 깨끗하고 합법적으로 영업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파친코 가게를 운영해 보지 않아 이런 설정이 어느 정도 현실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쳐도 결코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막연히 든다. 

같은 상황, 같은 조건에서도 일본인보다 더 정직하고 깨끗하고 점잖게 행동해야 한다는, 조선인에게 지워진 암묵적인 압박감을 나타내려 한 것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모범'에 대한 강박을 버리고 조금 더 현실적으로 묘사했다면, 오히려 더 깊은 페이소스를 자아낼 수도 있지 않았을까.

혹은 이런 것도 내 편견인 걸까.

 

어휘 선택이나 표기에도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었다.

(소설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주황 색으로 마킹한다. 관심 없는 분은 패스해도 무방)

#tmi 1
이 책에 대한 일본내 반응이 궁금해 아마존재팬에서 서평을 찾아보다가 알게 된 것. 일본에는 아직 번역 출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서평을 올린 일본인들이 본 것이라면 아마 영어 원서일 텐데, 요즘 젊은이들이나 쓰는 현대 일본어 'Maji'(マジ : '정말'이라는 뜻. 우리로 치면 '레알' 정도)가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지적도 있었다. 

아마도 배경이 현대로 접어들기 전의 단계에 저 표현이 등장한 모양이다. 

マジ의 유래에 대해 찾아보면 이미 에도시대부터 가부키 배우들 사이에서 쓰였다는 설도 있지만, 일반인들 사이에서라면 1980년대 이후 유행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tmi 2
그래도 이건 원서 문제니 상관 없다 쳐도, 한국어 번역본을 읽으며 가장 이상했던 것은 성(姓) 표기 부분이었다.

이삭, 노아, 모자수의 성은 '백'씨로 나오는데 한자로 하면 白일 것이다.

白을 일본식으로 음독하면 '하쿠'다.

조선인임을 감안해서 조선식으로 다시 한번 음독한다면 '베쿠'나 '페쿠'가 될 것이며, 아예 훈독으로 한다 해도 '시로', '시라' 정도다. 

그런데 책에서는 이것이 '보쿠'로 되어 있다. 보쿠 노부오(노부오는 노아의 일본 이름), 보쿠 모자수, 보쿠 솔로몬...

혹시나 해서 영어 웹을 찾아봐도 그 부분은 역시 'Boku'로 돼 있는 것 같다.

한국 성 중에 일본식으로 읽었을 때 '보쿠'가 되는 것은 '박(朴)'이다. 

하지만 한국어 버전뿐 아니라 영어 버전에서도 이삭의 성이 'Park'이 아니라 'Baek'인 것을 보면 저자가 '박'이 아닌 '백'씨로 설정하고 쓴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백(白)'의 일본식 발음은 어쩌다 저렇게 됐을까? 

혹시 1930년대 일본, 혹은 오사카에서는 白을 '보쿠'라고 읽었던 걸까? 잘 모르겠다. 

#tmi 3
'선자'라는 이름도 내가 산 책에는 '선자'라고 돼 있지만 어떤 사람이 쓴 서평을 보면 '순자'로 되어 있고,

어떤 이는 1권에서는 '순자'였다가 2권으로 가니 '선자'로 바뀌었다고 적기도 했다.

'Sunja'의 발음을 어느 쪽으로 할 것인지 결정이 안 된 상태에서 번역이 되어 그런 것인지..? 

소설 속 등장인물 이름에만 갸우뚱한 것도 아니다. 

#tmi 4
2권 뒤에 실린 작가의 감사의 말에 '이 책을 무사히 끝내는 데 중요한 바탕이 되었던 작품을 저술한 작가들' 중 한 명으로 '강상준'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아마도 재일 한국인 정치학자 '강상중(姜尚中)'을 잘못 표기한 게 아닌지... 

姜尚中을 한국 발음 기준으로 가타카나로 적으면 カンサンジュン이 되는데 간혹 이름을 이렇게 가타카나만으로 적는 경우도 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일본어 발음 특성상 마지막 글자의 받침이 'ㄴ'인지 'ㅇ'인지 애매해진다. 

굳이 따지자면 영어가 모국어에 더 가까운 저자가 이 부분을 '중'이 아닌 '준'으로 착각한 것일까.

혹은 그냥 내가 모르는 진짜 '강상준'씨일 수도 있다. 

다만 노아나 솔로몬의 삶에서 강상중씨의 자서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고뇌와 굴곡이 많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감사의 말에 거론된 사람이 강상중씨가 맞든 아니든 상관 없이, 대표적인 재일 한국인 출신 오피니언리더인 그의 삶의 이력도 이 소설 어딘가에는 분명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노아의 출신대학이 와세다인 점이나, 소설 속에서 집단 괴롭힘에 시달리는 조선인 소년의 일본 이름이 강상중의 개명 전 이름과 같은 '데쓰오'인 것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우연일 수도 있지만)

내용 전개와는 크게 상관 없지만 내 일이 일이다보니 개인적으로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 적어보았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상당히 흡입력 있는 스토리고 국적을 떠나 한번쯤 읽어볼 만 한 소설이다. 

책 표지와 띠지를 보니 미국에서 전미 도서상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고 하고, 각종 주요 언론이 뽑은 '올해의 책'에도 선정된 모양이다.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을 것이고, 애플TV에서 현재 드라마로 제작 중이라는 소식도 들었다. 

그러나 역시 가장 궁금한 것은 이 책이 과연 일본에서 번역 출간될 것인가, 이다. 

아마존재팬의 <Pachinko>(원서) 후기에 달린 일본어 댓글을 보면 일독을 권하는 댓글도 있고 아니나다를까 혐한 시각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이의 대댓글도 눈에 띈다. 

아직 정식 출간된 것도 아닌데, 민감하기도 하여라...ㅎ

나는 이 책을 Y에게 권하고 싶은 마음도 들고 권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든다. 

나이를 먹으며 모계 혈통의 역사에 점점 관심이 간다는 Y가 이 책을 읽는다면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지 궁금해 권하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혹여라도 맵고 쓰라린 것이면 어쩌나 싶어 권하고 싶지 않기도 한 것이다.

'아지요시' 앞 굴다리 속을 가득 메웠던 매캐한 연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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