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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게이치로 『ある男』(어떤 남자)

레테210 2019. 9. 2. 16:55

 

지난달에 읽은 책들은 대체로 만족스러웠지만 그 중 한 권을 꼽으라면 단연 이 책,

히라노 게이치로의 『ある男』(한국어로는 '어떤 남자'. 단, 현재 국내 미출간)다.

표지가 마음에 들어 종이책으로 갖고 싶었지만 미리보기로 초반부를 읽고나니

종이책 배송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그냥 전자책으로 사버렸다. 

 

서두 부분의 액자식 구성과 흡입력이 좋았다. 

저자가 한 칵테일바에서 '기도 아키라'라는 이름의 묘한 인물과 조우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부분은 픽션일까? 논픽션일까?-아니면 이슬아씨 표현을 따라하자면-'응픽션'일까?

뭐가 됐든 작품 전체에 상당한 리얼리티를 준다.

설정에 따르면 '기도'는 재일코리언이다. 

다만 우리가 '재일'이라고 들으면 언뜻 떠올리는 '차별, 억압'의 대상이라기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무리 없이 녹아들어가 변호사로 성공해서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을 꾸리고 사는 엘리트 '일본인'이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기도가 한 여성의 의뢰로 그녀의 전남편(사고사함) '다이스케'의 뒷조사를 하면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이스케의 친형도, 예전 애인도, 다이스케의 사진을 보고는 그들이 알던 그가 아니라고 한다.

추적하면 할수록 남성의 정체는 안개 속에 흐릿한 그림자만을 드리운채 사라지고

기도는 이때껏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 없던 자신의 정체성까지 균열이 가는 것을 느끼며 혼란에 빠진다. 

이야기의 일차적인 테마는 '다이스케'의 정체를 찾아가는 '기도'의 여정이지만.

그 과정에서 독자가 대면해야 하는 것은 보다 근본적인 '나의 정체성'이다. 

요 몇 년 사이 히라노 게이치로가 에세이 <나란 무엇인가>나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정체성'에 대한 지론을 피력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는데,

이번 작품의 큰 뼈대 중 하나도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정체성의 고뇌'라는 말이 어떻게 들으면 거창한 철학적 질문 같고

또 어떻게 들으면 진부하고 유치한 중2병 고민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작가가 제시한 개념들은 사실 우리의 일상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우리의 자아란 서양식 'indivisual('나눌 수 없음', 즉 언제 어디서 누구에 대해서는 '나'는 '동일한 모습'이어야 함을 내포하는 개념)'로는 규정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며

따라서 각자가 'divisual', 즉 '분인(分人)'임을 인정함으로써 

다양한 나를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고 나는 해석했다).

이것을 줏대없이 타인에 영합하려는 생각으로 읽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언제 어디서나 '하나의 정체성'만을 관철시킬 수 있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독재자마저도 내면의 자아는 그만이 알 수도 있는 것이니.

개개인의 자아라는 것이, 정체성이라는 것이 이다지도 취약한데도

우리는 때로 나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어떤 불가역적이고 단일하며 확실한 정체성이 있는 것마냥 착각할 때가 있고

그것이 흔들릴 때, 혹은 누군가가 흔들리는 것을 볼 때

불안해 하고, 때로는 공격적이 되기도 한다.

젠가처럼 수 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진 표지 속 남자도

머리를 감싸쥐고 고뇌하며 금방이라도 조각조각 분열할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다. 

'다이스케'가 되고자 했던 어떤 이의 모습,

그리고 '기도'가 된 또다른 누군가의 모습이다. 

 

일본 아마존 리뷰 중에는 '기도가 재일코리언 출신이라는 설정은 좀 뜬금없다'는 식의 의견도 있었다. 

보기 나름인 것 같다. 

작품의 '분위기'만 보면 다소 불필요하거나 튀어 보일 수도 있지만

주제의 '의미'를 생각하면 그렇게 이질적이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히라노 게이치로에게는 조금 놀랐다. (아마도 나만의 뒷북이겠지만)

이 소설, 재일코리언의 정체성 문제가 가미되다보니 약간 사회파 추리소설 같은 느낌도 나는데,

나는 <일식>이나 <달>처럼 몽환적인 분위기가 특징적이었던 그의 초기작만 읽었고

이후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사이 딱히 다른 작품을 업데이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렇게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작가가 된 거지(라고 하면 대단한 실례겠지만??)?

말인즉슨,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대중성'이 좋아진 느낌이다. 

찾아보니 몇 년 전에는 <마티네의 끝에서>라는 연애물(!)도 낸 모양이다. 

외모도 친숙해졌다. 

반항기 어린 눈으로 날카롭게 이쪽을 노려보던-누가 봐도 '나 천재' 아우라가 작렬하는-이십대 초반의 저자 사진이 참 강렬했는데

이제는 처진 눈과 적당히 푸근해진(?) 아재의 모습으로 매스컴 출연도 자연스러운

중견 작가가 되었구나.

안 보는 새 많이 달라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런 인간적인 변화가 결코 싫지 않다.

세월과 함께 고민의 깊이를 더하며 성숙하게 변화한 작가의 모습이 고맙고, 흐뭇하다.

근 이십 년 만에 다시 히라노 팬으로 복귀하게 되려나보다.

 

 

덧>그런데 이 책 왜 아직 한국 미출간인 걸까.

일본에서 나온 지 1년 가까이 돼 가고 얼마 전 서점대상도 받은 모양이던데.

상 받을 것 예상하고 작업하다 아직까지 번역/편집 중인 건지,

혹은 대충 끝났는데 경색된 한일 관계 때문에 타이밍을 보고 있는 중인지.

일본 소설가 중 이 정도 지명도의 작가의 책이 이렇게 안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일단 나온다면 국내 호응은 나쁘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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