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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소식

시오노 나나미가 한국의 적?

레테210 2016. 6. 22. 15:43

http://business.nikkeibp.co.jp/atcl/report/15/226331/062000056/?P=1

 

오늘자 닛케이온라인에 묘한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한국의 공적(公敵)이 된 塩野七生'

염노칠생.

처음엔 이름이 낯설어 '누구?' 하다가 두번째 글자(시오노)까지 훈독한 순간 비로소 '아~' 했다.

내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처음 접한 건 일본어를 배우기 전이라 그의 이름은 발음만 알았지 한자로는 몰랐다.

가끔 그가 위안부 관련 망언을 했다는 둥, 글에 시대착오적 제국주의적 시각이 농후하다는 둥 하는 얘기는 들은 것 같지만

별로 신경이 쓰이지도 않았다.

하나하나 찾아보기 시작하면 그런 사람 한둘이 아닌 데다가

시오노가 이제 더 이상 한국 출판계에서 핫한 키워드가 아니라선지 그의 사견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젠 이시하라의 망언마저도 시큰둥할 지경이니.

그런데 그런 시오노가 '한국의 공적'이 되었다고?

언제 나 모르게 이 나라의 주적이 북한에서 시오노 나나미로 바뀌기라도 했나? 그런 중요한 일을 나는 왜 몰랐지? 나는 한국인이 아닌가?

내가 시사에 어두워서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 대개는 기자들의 선동적이고 자극적인 기사 작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기사에는 두 꼭지의 다른 기사가 등장한다. 

하나는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즈음해 아사히신문이 실은 시오노 나나미 인터뷰기사,

나머지 하나는 이 아사히-시오노 인터뷰기사를 보고 한겨레신문의 길윤형 기자가 쓴 '특파원 칼럼'이다.

문제의 발단이 된 아사히-시오노 인터뷰기사에서 시오노가

'우리는 외교 감각 결여된 어떤 나라들(아마도 한국과 중국)처럼 시끄럽게 사죄를 요구하지 말고 조용하고 품위있게 오바마를 받아들이자'며

이웃나라를 '퍽 품위 있게' 디스하는 방식으로 '자국의 품격있는 외교'를 주문했는데 

길윤형 기자가 자국 원폭피해자의 목소리보다도 '국가의 품격'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시오노의 이런 주장에 대해

'책상 위에 토하고 싶다'며 다소 격한 반응을 보인 것.

그리고 기사를 실은 아사히신문에 대해서도 길윤형은 '왜 이따위 인터뷰를 이처럼 민감한 시기에 실은 것일까'하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이번 닛케이 기사는 한때 서울 특파원을 지냈고 지금은 본사에서 한국 관련 칼럼을 연재중인 스즈오키 다카부미(鈴置高史)가 

오바마 방일 관련 한국측 반응에 대해 집필한 일련의 기사 중 하나로,

길윤형의 칼럼을 도마 위에 올려놓은 이번 회만 들여다봐도 편견과 착각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韓国語版(5月26日)の記事では「塩野七生」は初めから最後まで呼び捨てです。韓国の公敵に認定されたわけです。ただ、韓国人が「塩野七生」にカチンと来るのはそれだけが理由ではありません。

"5월 26일자 한국어판 기사(길윤형의 칼럼)에서는 '시오노 나나미'라며 처음부터 끝까지 경칭 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한국의 공적으로 인증받은 것이죠. 그런데 한국인이 '시오노 나나미'에 열받는 이유는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전에 한국을 방문한 한 일본인 기자가 내게 '한국 TV 뉴스는 왜 아베 총리에게 경칭을 붙이지 않느냐'며 슬쩍 불만을 토로한 적이 있다.

이때 경칭이라고 해봤자 대단한 것은 아니고 '총리', 혹은 '수상' 같은 공식직함을 왜 붙이지 않냐는 것이었는데

이 지적은 일부 타당하다고 생각했다.

어느날 뉴스를 듣다보니 정말 '버락 오바마'에게는 꼬박꼬박 '(미)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붙이고 있었지만

'아베 신조'에게는 '총리'라는 말을 대개 붙였지만 간혹 붙이지 않기도 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아베 총리에 대한 한국민의 감정이 좋지 않은 것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그와는 별개로 '공공의 입'인 언론에서는 타국을 대표하는 이에게 공적인 호칭을 쓰는 게 맞다.

하지만 일국의 원수도 아니고 딱히 공적인 입장에 있는 것도 아닌 시오노 나나미에게 우리가 굳이 경칭을 붙여야 할까?

붙인다면 뭐라고? '시오노 나나미 작가'? '시오노 나나미씨'? '시오노 나나미 선생님'?

참고로 나는 <채식주의자>의 저자인 한강도 '한강 작가'라거나 '한강씨'라고 불리우는 것을 거의 듣지 못했다.

외국인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씨'를 붙이던가? 중국 소설가 위화에게도 그냥 '위화'라고만 할 때가 많다.

특히나 당사자에 대한 2인칭 호칭이 아니라 3인칭 지칭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경칭 안 붙이니 공적이 된 것이라'니, 지나친 일본식 해석이다.

(물론 한국에도 별다른 말 없이 이름만, 그것도 풀네임으로 부르면 멸칭이 되는 경우가 간혹 있기는 한데 이는 매우 특수한 경우며

한겨레 기사 속 '시오노 나나미'가 그 정도의 경멸스런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인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기자 스즈오키는 한국 특파원 생활을 꽤 오래 했던데, 언어를 다루는 일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건

언어나 이문화에 대한 센스가 얄팍하거나

아니면 애초에 있지도 않은 어떤 분위기(가령 특정 대상에 대한 적개심)를 조성하고자 하는 의도성이 짙어 보인다.

 

물론 경칭 사용 따위는 이 일련의 기사들에서 핵심적인 부분은 아니다.

그러나 이야기 전개의 전제가 되는 부분에도 모순과 아전인수식 해석은 깔려있다.

애초에 시오노는 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에 시끄럽게 사죄를 요구하지 말자'고 했다.

그 말은 '우리는 사죄를 요구할 자격이 있지만 품위를 지키기 위해 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무슨 사죄?

논란(한국에서는 일어나지도 않은 그들만의 논란이지만)의 발단이 되었던 아사히 기사에 따르면

시오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ヨーロッパは旧植民地帝国の集まりみたいなようなものだから、日本の優に十倍の年月にわたって、旧植民地に言わせれば、悪事を働きつづけた歴史を持っているのです。それでいて、謝罪すべきだなどとは誰も考えない。

유럽은 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모여있는 곳이라 일본의 족히 열 배는 되는 세월 동안-구식민지 입장에서 보자면-나쁜짓을 저질러온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도 아무도 사죄해야 한다는 생각 안 하거든요.

 

이 말에 대한 반박 거리도 많겠지만 백보 양보해 시오노의 말이 맞다 친다면 애초에 미국이 일본에 사죄해야 할 이유도 없다.

미국-일본 관계와 식민지 지배-피지배국 관계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미국은 일본에 대한 식민종주국이 아니라 교전국, 승전국이었다는 점 정도인데

전쟁에서의 정의가 승패로 갈리고 이긴 쪽이 선(사실 이는 자국이 이겼을 때 뿐이긴 하지만)이라는 그야말로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자면

승전국인 미국이 패전국인 일본에 사죄를 할 이유는 더욱 더 없다.

그렇다면 애초에 오바마는 생각하지도 않았을 사죄를

무슨 상상의 동물처럼 저들 혼자 상상했다가 '안 받는 것으로 할게' 한 꼴이다.

...정신승리치고는 퍽 '품위 있'다.

물론 이런 식의 논리 역시 일견 명쾌하나 지나치게 단순하며 사실 들여다보면 허점도 많다.

'그들의 사고방식에 따르자면'이라고 단서를 단 것은 그 때문이다.

어찌되었건 전쟁에 휘말려들어 피폭이라는 끔찍한 고통을 당한 일반인들에 대한 가해국의 애도와 통절한 반성은 있어야 한다.

길윤형도 그런 의미에서

'원폭 피해 당사자들이 미국 대통령에게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고, 사죄를 요구하려는 마음은 인지상정상 이해할 수 있다...

인류가 겪은 이런 고통을 부인하는 이와는 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한 것이리라.

 

그러니까 여기까지는 '피해'만을 강조하는 저들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고 정말 하고 싶은 얘기는 따로 있는데,

사실 나는 시오노의 저 발언 자체, 즉 '유럽도 사죄 안 했어' 하는 식의 치졸한 책임 전가에 더 큰 문제의식을 느낀다.

유럽이 기라고 하면 기인 것이고 아니라 하면 아닌 것인가?

유럽의 사죄 여부가 일본의 만행을 사해주는 면죄부라도 되나?

그런 조건부 사죄에 과연 어느 정도의 진실성이 있는 것일까?

유럽 식민국가들이 사죄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보기에 과거의 피지배국들이 현재도 별 힘이 없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한 유태인, 이스라엘에 독일은 전후 끊임없이 사죄해 왔다.

이쯤 되면 독일과 자신들은 다르다는 궤변이 꼭 나온다.

닛케이 기자는 시종 한국(길윤형)이 자국에 불리한 부분은 쏙 빼놓고 있다는 말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들며 비판하는데,

내 보기에도 한국에 그런 부분이 분명 있지만, 사실 그런 자기중심성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개인을 불문하고 다 있었으며

이는 일본이라고 결코 예외가 아니다.

난징대학살이 날조라고 주장하는 책이 아직도 잊을만하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으며

일본 당국에 의한 위안부 동원설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증거 앞에서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언론사들은 거의 언제나 진실을 외면해 왔으니.

특히 요즘 일본의 일부 세력이야말로 밖에서 보기에 취하고자 하는 것만 취하고 보고 싶은대로만 보는 아전인수 끝판왕이라는 사실을 정말 모르는 것인지.

 

게다가 이 기사는

한국이 자꾸 일본을 몰아세우기 위해 '식민지 카드', '위안부 카드' 등의 '카드'를 꺼낸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 논리대로라면 전쟁 발발의 책임은 쏙 빼놓고 '원폭피해자 카드'만 들이미는 자국의 굴절된 피해의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모르겠다.

(오바마를 조용하게 맞이한다고 해서 피해자 어필을 안 한다고는 볼 수 없다)

남이 나에게 내미는 불편한 진실은 악의에 찬 협잡성 '카드', 내가 내미는 것은 순수함 외에 그 어떤 의도도 없는 '진실'인가?

그야말로 '외교를 뭘로 보고 하는 소리'인지...ㅎㅎㅎ

 

기사 말미에는 이런 언급도 있다.

 

韓国人が「日本の良心」と持ちあげてきた朝日新聞が「植民地支配を謝罪する欧州の国なんてないぞ」と本当のことを書いてしまった。韓国人とすれば、飼い犬に手をかまれた感じでしょう。

한국인이 '일본의 양심'이라 치켜세워왔던 아사히신문이 '식민지지배를 사죄하는 유럽국가는 없다'며 진실을 적고 만 겁니다. 한국인 입장에서 본다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이겠죠.

 

여기서 말하는 '진실을 적고 말았다'의 진짜 주어는 무엇일까? 아사히신문? 틀렸다.

'식민지지배를 사죄한 유럽국가는 없다'는 시오노의 발언이지 아사히 기자나 아사히신문의 주장이 아니다.

정치적 노선이 비교적 뚜렷한 언론사일지라도 때로는 자사와 논조를 달리하는 인터뷰이와 인터뷰하기도 한다. 이는 닛케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사히 기자도 그저 인터뷰이의 말을 '대신' 적었을 뿐이다.

이 문장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원래 시오노가 한 말)을 아사히신문의 판단과 논조인양 교묘히 둔갑시키고

거기에 친절하게 '진실'이라는 보증서까지 달아준 것은 다름아닌 닛케이 기자다.

아사히신문의 원 인터뷰기사를 찾아보니

이웃나라의 외교 감각 결여 운운하는 시오노에게 기자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대꾸하고 있다.

 

――厳しいですね。その2国には、言わずにはいられない思いがあるからでは。

-가차없으시네요. 그 두 나라가 (유럽 순방시 일본을 비판한 데에는) 꼭 해야 할 말이 있어서는 아니었을까요?

 

닛케이 기자 스즈오키 다카부미는

언어 감각과 이문화에 대한 이해도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자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 모럴-자기 주장을 남의 입을 빌려 하지 말아야 한다는-도 다소 부족한 듯하다.

물론 그가 일본 국가대표 기자도 아니고 그와 다른 생각을 하는 일본 언론인, 일반 시민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다만 이런 사람이 자타칭 '한국통'이랍시고 한국인에 대해, 그 정서에 대해 뭔가 대단히 많이 아는 양 써대는

소위 '한국 관련 기사'를 볼 때마다,

있지도 않은 '적' 개념을 만들어놓고 섀도우복싱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깊은 한숨이 나오는 것이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