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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요지경

레테210 2016. 4. 20. 18:29

부제 : ~「骨折り損のくたびれもうけ」とは~

 

어제 열렸던 모 관광 관련 세미나에서

중국 H성에서 온 참석자의 발표 통역을 맡았다.

중국어 발표고 청중은 한국, 중국, 일본인이 다 있었으므로 통역은 다음과 같은 릴레이통역이 된다.

 

중국인 연사가 발언->한중 통역사가 중한 통역->한국인 청중이 들음

                                                                             ->(한국인 청중이 중한 통역을 듣는 같은 순간)한일 통역사가 한일 통역->일본인 청중이 들음

 

행사가 임박산 시점에 자료를 받았는데 다른 어떤 연사보다 원고가 길었고(혼자서 다른 사람의 약 4-5배)

그 안에 조사할 내용도 워낙 많아 솔직히 이 사람 자료 공부하느라 다른 연사 원고는 들여다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여러 명이 나와서 똑같이 주어진 시간만큼 발표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정도면 솔직히 다른 연사에게 좀 민폐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만큼 자기 고장에 대한 자부심이 넘친다는 얘긴데 그건 아주 나무라기만할 것도 아닌 것 같았고

무엇보다 통역은 그 자부심도 잘 전달해야 하니까, 반쯤 연사에 빙의돼야 하는 거니까

이왕 하는 일 너무 불평하지 말고 열심히 하자 싶어

다른 때는 하지 않던-아예 일본어 원고를 내가 직접 작성하는-작업까지 했다.

특히 고유명사 발음에 나름 신경썼다.

일본과 중국은 모두 한자를 쓰지만 발음은 당연히 다르다.

요즘 추세대로 현지발음을 우선시하면 되지 않냐고들 하고 사실 정 급할 때는 그렇게도 하지만,

준비할 때부터 그런 것을 당연한 것, 디폴트로 생각하고 임해서는 '당연히' 안 된다.

'시진핑', '마오쩌둥' 급의 유명한 고유명사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현지발음이 오히려 청중의 이해를 저해하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근대 이전의 사람이나 지명, 국명, 가령 '주나라'를 '저우'나 '주'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죽으나 사나 해당 명사의 일본식 한자발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모든 고유명사 속 한자의 일본식 발음을 일일이 찾아 원고 속에 눈에 잘 띄게 굵게 표시까지 해두었다.

개중에는 일본에서 사용하지 않는 중국 간체자가 많았는데 이런 건 원래 글자인 번체자를 찾아내고

그 번체자의, 혹은 그것의 일본식 약자의 발음을 또 찾아내야 한다. 결국 그 원고 하나 준비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행사 전날 밤에는 '쟈오산다오과-장성'이라 듣고 일본식으로 '가쿠잔토우케이-쵸우죠우'로 발음하다가 혀가 씹히는 일이 없도록 늦게까지 연습도 했다.

 

그러나 막상 행사가 시작되고 다른 나라 연사들 발표가 시작되었는데, 에이전시측 얘기를 들어보니

이 중국인 연사는 발표를 안 하고 동영상만 튼단다.

...아...

.....아......

........악.......!!!!!!!!!!!!!!!!!

내면의 깊은 곳에서 고요한 빡침이 느껴진다...

없는 시간 속에 이틀을 세수도 못하고 오로지 그 원고에 바쳤건만...

물론 그만큼 덜 떠들어도 된다는 얘기니까 약간의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봤자 그로 인한 양가적인 감정의 비율은 '빡침 : 반가움 = 9 : 1' 정도랄까?

빡침, 이라는 저속한 단어를 썼지만 양해 따위를 구할 생각은 없다.

어떤 통역사는 '통역하면서 살기를 느낀다'고까지 할 정도니까. -_-

그러나 빡침과 살기의 대상은 모호하다.

연사가 애초에 '구두 발표는 거의 안 하고 동영상만 틀 것'이라고 말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한 것인지,

연사는 제대로 말했는데 주최측이나 에이전시측 어딘가에서 미스커뮤니케이션이 벌어진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니까.

다만 중문 원고까지 준비됐었던 것으로 미뤄 중국인 연사가 처음에 의사표명을 불분명하게 했던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

 

아무튼 그러려니 하고 있는데 잠시후 한중 통역사가 우리 부스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말을 정정한다.

다시 발표를 하게 됐다고. 다만 원고의 5~6분의 1정도, 앞부분만 하게 됐다고.

이틀 동안 입에서 불인지 욕인지 쉰내인지를 뿜어가며 준비했던 내용들은 거의 뒷부분이었다.

 

흠...

이런 일이 사실 처음은 아니다.

오히려 원고나 시나리오 그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드물 정도로 돌발상황은 거의 언제나 발생한다.

문제는 돌발상항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너무나 '쓸데없는 일을 많이 시킨다'는 점에 있다.

처음부터 원고는 발표할 만큼만 만들어 전달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러시아, 몽골 등 내가 맡았던 다른 나라, 다른 지역에 관해 더 많이 연습할 수 있었을 것이다.

H성에 있는 만리장성의 관문 이름과 청나라 황실의 사냥터 이름을 외우고 그 유래를 알아보며

북제시대 초절정 미남 군주 난릉왕를 소재로 한 곡이 고대 일본에 전해져 어떤 날 연주되었는지를 찾아내고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맺은 곳이 지금은 뽕밭이 되었는지 복숭아밭이 되었는지를 알아가는 것은

재미있는 작업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런 지식들이 따분하기만 하지는 않다.

단,

이렇게 바쁠 때,

이렇게 많이,

나중에 하나도 빛도 못 볼 이런 작업들을 하고 싶지는 않다.

솔직히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건은 애초에 원고와 발표 방식 자체에 문제가 많았다.

세계 최고, 최장, 최대, 최다가 넘쳐나는 중국이니 자랑하고 싶은 것도 많겠고 이 점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런 것을 일일이 열거하는 식의 발표에서는 당연하게도 아무런 감동도 재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온갖 신선하고 풍부한 재료로 기껏 잡탕이나 만들어내는 꼴이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면 '아무리 고르기 힘들다 해도' 그 중 가장 좋은 것만 추려내어 집중적인 소개를 해야 한다.

결국 연사의 안목과 취사선택 능력에 달려있다.

(경험상 중국이 좀 두드러지긴 하는 편이지만, 사실 어느 나라나 이런 연사는 있다. 특히 '관'에서 하는 발표는 거의...)

 

그리고 세미나와 관련된 온갖 조직, 사람들을 거쳐오면서

관련 연락은 누락, 변질, 왜곡된다.

성실한 통역사들은 그래도 전달받은 얼마 안 되는 정보와 자료로 나름대로 최선의 준비를 하지만

현장에서는 수시로 순서가 바뀌고, 많은 내용이 삭제, 요약되면서 가뜩이나 머릿속 복잡한 통역사에게 혼란을 준다.

 

어제 H성에서 온 연사는 말도 빨랐다.

그리고 한중 통역사도 말이 빠른 편이었다.

통역의 특성상 도착어의 문장 길이가 길어지므로 나는 입에 엔진이라도 장착한 것처럼 그야말로 따발총처럼 일본어를 쏘아댔다.

청중들이 알아들었을까? 자신이 없다.

아마 내 일본어를 한국어로 다시 옮긴다면 이런 식으로 들렸을 것이다.

"토으잔취역피인시ㄹ라불리그림자연극기취역ㄱ의타수화소슈취옄ㅋ의무술고쿄취역의서커스고수이치역내화우쓰취역의센시...."

이를

'성내 각 지역의 유무형문화재, 즉 그림자연극이나 타수화/내화와 같은 그림, 무술, 서커스, 종이예술 등'이라고 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발표는 끝나있게 마련.

부스 바로 앞쪽, 통역사들에게 등을 돌린 채 연단쪽을 바라보고 앉은 한 젊은 남성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일본인 청중의 수행 통역원 같았다. (수행원 중에는 자체적으로 데려오는 수행 통역원이 있는 경우가 간혹 있다)

H성 발표에 관한 통역이 이어지는 내내 나는 그 사람이 일본어 통역부스쪽을 힐끔힐끔 뒤돌아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못알아듣겠네. 저러고 동시통역비를 받다니, 차라리 내가 하고 말지!'

 

어제 내 파트너가 일본어를 한국어로 통역하는 부분에서도 한국인 청중이 일제히 우리 부스를 뒤돌아봤는데

알고보니 통역이 장내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는 우리가 장비 조작을 잘못했는 줄 알고 무척 당황했는데, 나중에 알았다.

다른 누군가가 엉뚱한 채널을 누르는 바람에 우리 부스의 통역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험악한 눈빛은 자취를 감췄지만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통역사들 왜 이래'하고 생각하지나 않았을지.

나도 전에 다른 건으로 통역할 때, 명백히 주최측과 사회자의 진행 미스였는데

부스 안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험악한 눈빛을 옴팡지게 뒤집어쓴 적이 있다. 그때의 억울함이란...

 

집에 오는 길에는 파트너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우리끼리 이런 이야기로 꽃을 피우고, 함께 열을 냈다.

집에 도착할 무렵에는 그래도 웃으며 헤어질 수 있었다.

그나마 이해해주는 서로가 있어 다행이랄까.

 

오늘은 어제 오후 4시를 기해 일제히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원고들을 처분하다가

H성 원고의 일역본을 보니 쓴웃음이 난다.

왠지 억울해서, 이곳에라도 올려본다.

누가 보랴 싶다만. ㅎㅎ...

 

관광교류회-허베이성-일본어.doc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