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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한 마디

적반하장(賊反荷杖)의 일본어

레테210 2019. 8. 6. 11:59

 

하루가 다르게 격해지고 있는 한일 무역 갈등 속에 며칠 전 매스컴에서 화제가 된 고사성어가 있다.

 


적반하장(賊反荷杖)

賊 도둑 적 / 反 돌이킬 반 / 荷 멜 하 / 杖 지팡이 장

도둑이 도리어 몽둥이를 든다는 뜻으로, 잘못한 사람이 도리어 잘 한 사람을 나무라는 경우를 이르는 말 

-네이버 한자사전


 

문제의 발단이 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었다.

"가해자인 일본이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큰소리치는 상황을 결코 좌시하지 않겠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기로 결정한 데 대한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 가운데 나온 말이다.

 

다른 어휘와 마찬가지로 '적반하장'도 TPO에 따라 다양한 일본어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다. 

다만 그 중에서 하나만 꼽으라면 '盗(っ)人猛々しい(도둑질한 놈이 더 뻔뻔하다)'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 통역사가 많을 것이다. 

통번역 훈련시 통역의 효율성을 위해 1:1 매칭되는 관용적 표현이 있으면 그것부터 먼저 익히기 때문이기도 하고,

賊-盗っ人 모두 '도둑'이라는 뜻이라 액면 그대로의 의미로 보았을 때 가장 근접한 표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부 일본 정치인과 언론에서는 이 부분을 걸고 넘어졌다. 

무례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일부 일본 정치인이란...수염이 낯익다 했더니 전에 이 블로그에서도 언급한 적 있는 사토 마사히사였다.

https://midnight-express.tistory.com/246 동영상 속에서 '자민당 맨스플레인'을 시전하는 사람으로 나온다)

 

국내 모 방송사에서는 이를 두고

'한반도를 강제로 병탄한 역사가 있는 일본이 "도둑"이라는 표현에 민감하기 때문'이라는

한 전문가의 의견을 소개하기도 했다.

실제 그런 정서가 집단적인 수준에서 있는지, 일본학 전문가나 사회학자가 아닌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만 한국인으로서, 그리고 말로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으로서 확실히 얘기할 수 있는 것 하나는,

한국인들이 저 말을 사용할 때는-화자의 지위고하, 상황이나 맥락을 불문하고-'賊(도둑 적)'자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의미를 부여하기는커녕, 아예 이런 한자로 되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쓰는 경우가 태반이 아닐까. 

이걸 두고 한 국내 수구 언론인(조*제)은 유투브에서 '한글전용주의자의 말실수'라며 '오버'를 떨었다. 

한자가 한국어 어휘의 70퍼센트를 이루고 있으니만큼, 나는 한자 교육은 하는 게 맞다고 본다. 

다만 우리에겐 한글이 있어 중국이나 일본처럼 상시, 혹은 자주 한자를 표기하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별 지장이 없다.

그 영향으로, 사람들이 발음은 하지만 정확한 뜻이나 한자 구성은 모르고-간혹 틀리게-사용하는 한자어도 많다. 

'적반하장'도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정확한 언어 생활을 위해, 온국민이 모든 한자어의 구성을 속속들이 외우고 자구나 따지며 살아야 할까?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게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적반하장'을 한자로 쓸 줄 알고 사전적 뜻을 다 알고 있었다 해도

이번에 그 단어를 빼버렸을 것 같지는 않다. 

한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상황과 맥락에 맞는' 어휘 선택이었다.

 

물론 그 상황과 맥락은 상대적인 것이고,

사전적 의미가 동일한 표현이라도 어느 정도 폭의 의미와 강도로 사용하는지는 나라에 따라 다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적반하장'이라는 말을 가볍게 사용하고 이때 굳이 '도둑'까지 떠올리며 정색하지는 않는데 반해

일본에서 '盗っ人猛々しい'라는 말을 사용했을 때 어딘가 튀는(?) 느낌이 들 수 있는 것은 그때문이다. 

말을 사용하는 범위, 사용했을 때 느껴지는 강도가 미묘하게, 그러면서도 분명히 다른 경우가 많다. 

달라지는 이유도 각양각색일 것이다.

위에 소개한 전문가의 의견처럼 이 경우에는 '도둑'이라는 말에 거부감이 들어서일 수도 있고

특정 관용어의 경우 길이가 너무 길어 잘 쓰지 않아보니 어쩌다 쓰면 튀게 들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실제 일본인과 대화 중 '청출어람'을 직역한 '青は藍より出でて藍より青し’라는 말을 했다가 왠지 머쓱해졌던 적이 있다.

고사성어가 한국어에서는 보통 네 글자인데 반해, 일본어로 하면 네 글자인 경우도 있지만 중간에 토씨가 끼어들어 길어지는 경우도 많다. 

우리가 '청출어람'이라고 하지 않고 굳이 '청색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푸르다'라고 풀어 말할 경우를 상상하면 얼추 비슷할 것이다.

안 그래도 고루한 느낌이 들 수 있는 고사성어인데 길이까지 기니 한국에 비해 덜 쓰는 게 아닌가 싶다)

이런 문제에서는 두 나라 중 한쪽이 늘 맞고 한쪽이 매번 틀렸다 할 수는 없다. 

상대 국가의 언어 사용 습관과 경향을 이해하고

민감한 사안일 경우 번역시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아무리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번역해도

듣는 이에게 어떤 편견이나 의도가 이미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면 별무소용이겠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일본에서도 이 문제를 계기로

한국어 '적반하장'이 어떤 강도와 뉘앙스로 쓰이는 말인지 차분히 톺아본 기사가 있었다는 사실.

http://agora-web.jp/archives/2040720.html

 

朝日が報じた文在寅発言「盗っ人猛々しい」は本当?原語の「賊反荷杖」とは

日本政府が2日、輸出管理の優遇対象国(ホワイト国)から韓国を除外したことを受け、文在寅大統領が日本に対して「盗っ人猛々しい」と発言したという日本メディアの翻訳が、ネット上で議論を呼んでいる。 朝日新聞はこの日、韓国大統領

agora-web.jp

위 기사에서는 '盗っ人猛々しい'를 대신해서 '적반하장'을 나타낼 수 있는 번역어로

「逆ギレ」「居直り」「開き直って大口をたたく」道理に合わない主客転倒

와 같은 표현들을 제시하고 있다.

다만 이런 표현들은 상황에 맞게 사용하면 아주 자연스럽지만, 그렇다고 과감히 사용하기는 다소 부담스러운 면도 있다.

액면 그대로 번역하지 않으면 않았다고 독박쓰곤 하는 것이 외교적 언사를 옮길 때의 고충이라...

실제로 고위급 회담 등에서 '오역' 논란이 빚어질 때 그런 경우를 간혹 본다. 

통역사가 대화의 맥락이나 화자의 뉘앙스를 감안해 '본인이 생각하기에 적절한 수준으로' 의역했는데

뭔가 문제가 생기면서 '통역사가 잘못 이해하는 바람에'로 혼자 뒤집어쓰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던 것...ㅠㅠ

 

어느 나라와의 외교 관계에나 이런 살얼음판이야 깔려 있겠지만

현해탄에 낀 살얼음은 특히나 '얇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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